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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영 박사 칼럼, “예스”(그렇다)와 “노”(아니다)가 불 분명한 사람들 (2)

미국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교수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0-09-22 (화)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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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교수*


예스”(그렇다)”(아니다)가 불분명한 사람들 (2)

신학에서 중도와 같은 중간상태(the mediate state)란 종말론적으로 인간이 천국지옥"생과 사"의 갈림 길(중도)에 서 있는 현재나 사후의 인간 상태를 의미한다. 존재론적 본질론을 말하는 것이다. 생사가 결정되기 직전의 상태로 이것을 실존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의 위기신학(the Theology in Crisis)에서는 실존적 의미가 부여된 위기 앞에 서있는 존재”(existence standing before crisis)로 표현한다. 실존주의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인간에게 죽은 과거(dead past)도 아니고 가능성(possibility)의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결단을 요구한다고 한다. 이것은 중간지점에서의 자기 결단(self-determin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도파들은 정치철학의 처세전략에 따라 좌편에도 우편에도 설 수 있는 사람들로 자기 결단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편에나 저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핵정국에서도 자신들의 계산에 따라 좌 클릭을 하지 않았던가? 엄밀하게 말해서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그대들의 정체를 밝히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가? 물론,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을 떠나서, 정체성의 착각과 처세의 당위성을 고집하여 그들이 선택한 행위와 결과에 대한 책임도 깨닫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자신을 의인(의병)들로 착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극좌와 극우의 상황에서 중도의 철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좌이건 우이건 정체성이 철두철미하지 못한 중도파들은 좋은 의미로는 상황을 보아서 결정하겠다는 미결정 상태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좌나 우에 의하여 기회주의자들이니 회색분자들이니 하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좀 더 혹독한 표현으로 양 편에 의해, 즉 언제라도 좌우에 의하여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교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확실한 정체성을 밝히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것 같은데 분명히 밝히라고 집요하게 요구를 하는 것에 대하여 차별금지법 특히 동성애나 동성결혼은 창조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 없이 해명을 해주었는데도 계속 반복해서 물으니 어떻게 하겠느냐며 이제부터 이에 대응하지 않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당사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경의 창조원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하면서 해명을 해주었는데도 질문하는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물어오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는 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에 대해서 제3자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에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는 소통의 문제로, 질문하는 자는 대답하는 자의 대답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질문자가 묻는 질문의 핵심에서 벗어나 마치 남의 일처럼 빙빙 돌리며 변죽만 울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질문자가 묻는 핵심은 당신이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느냐? 아니면 반대하느냐?”인데, 이에 대하여 자신의 신념으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차별금지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를 설명하여 자신에 관계된 본질적인 질문을 회피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질문자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물었는데 대답하는 사람은 상황적인 대답으로 빙빙 돌리며 구구하게 설명함으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서구사람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스”(Yes) 아니면 ”(No)라고 분명히 대답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하셨다(5:37). 물론, 이 말씀은 앞의 말씀의 문맥으로 보아 인간은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는 전제를 깔고 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없으니 그냥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앵무새같이(?) 따라 말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사와 말할 자유까지 깔아뭉개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Yes) 하시면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No) 하시면 ”(No)라고만 하면 된다는 뜻이며,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 evil one)에서 난다고 해서 구구하게 인간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이 말씀은 좌우(left and right)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좌이던 우이던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고 했다.  

한번은 유튜브 방송을 듣다가 이와 같은 문제에 접하게 된 적이 있었다. 질문하는 목사님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질문에, “예스”(Yes)”(No)냐 답하라고 하는 공개 질문을 받은 목사님께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며 질문의 핵심을 피해나가는 듯 한 인상을 주니까 답변하는 목사님의 진위가 무엇인지? 의심을 하게 되니, 질문하는 목사님이 또 다시, 공개질의로 그냥 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라고 한마디만 대답해달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대답 중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에 대하여 구구하게 설명을 하게 되면, 본질적인 대답의 의미가 흐려지게 되기 때문에, 다시 의혹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구구한 설명은 피하고 그냥, 확실히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말하고, 또 물으면 역시 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몇 번을 물어도 확신을 가지고 반복해서라도 분명히 대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반복해서 질문하는 것은 구구한 설명으로 인해 발생한 의혹 때문이니 이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확신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말해주어야 한다.  

차별금지법(1)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중심 요소인 소위 화해 평등”(equality for rapprochement)을 배경으로 하여 출현한 차별의 의미를 왜곡시켜 만들어진 교활한 악법이다. 예를 들어 남여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왜곡해서 남여의 성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성애(homosex)나 동성결혼(same sex marriage)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실, 남녀 간의 차별(discrimination)은 남녀의 구별(distinction)과 다르다. 남녀의 구별은 존재론적인(ontological) 것으로 성의 구조적 문제이고, 남녀의 차별은 속성으로서의(attribute) 인격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남녀 간의 차별은 있을 수 없으나 남녀 간의 구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의하여 남녀라는 구조로 구별하신 것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2) 차별금지법을 시행할 때에 그 법의 확대해석이나 적용으로 엉뚱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경우와 같이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남녀의 구별의 내용을 남녀의 차별의 뜻으로 왜곡하거나, 동성애자들이 찾아와서 결혼식 주례를 해달라고 요청할 때에 목사가 수용하지 않고 반대를 해도 차별금지법에 해당된다고 고발(sue)을 당할 수 있고, 실제로 미국에서는 목사가 고발당한 사건들이 있다. 그리고 사회나 거리에 나가서 맘대로 전도를 못하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차별금지법은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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