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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영 박사 칼럼, 인간의 본질적 본능과 실존적 욕망 (The Natural Instincts and Existential Desires of Man)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1-06-01 (화)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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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본질적인 천부적 본능(God given Instincts)이 있다. 그것은 식욕(食慾)의 본능과 성욕(性慾) 본능, 권세와 명예욕(權勢와 名譽慾)의 본능, 그리고 귀소(歸巢)의 본능으로 이들은 본래 거룩한 본능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먹을 수 있는 과실들(창 2:16; 1:12)과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배필을 주셨고(2:18), 세상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명예(창 1:28)를 주셨으며, 에덴의 낙원(천국)을 사모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의 본능(히 11:14~16)을 주셨다. 이러한 본능들은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에 축복으로 주신 선물(God‐given gifts)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뱀(마귀/Stan)의 유혹을 받아 이러한 본질적 본능들이 실존적 욕망으로 타락하게 되었다(창 2:16~19). 다시 말하면, 거룩한 영적인 본능들(holy spiritual instincts)이 타락한 정욕적 욕망들(carnal desires)로 변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거룩한 본질적 본능이 타락한 실존적 욕망으로 변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부지중에 일말의 거룩한 본능이 발동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이 욕망을 이룰 수 없으며, 그 대신 실존적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돈(물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도 마다치 않고,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비정상적으로 불륜을 저지르는 일과, 권세와 명예를 누리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불법을 자행하며, 귀소의 본능을 찾아 종교에 귀의하고 미신에 의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실존적 욕망을 충족시켰다는 사람들의 결국을 보면, 솔로몬이 고백한 것과 같이, 허무하기 짝이 없고, 해피 엔딩(happy ending)이 아니라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 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2:17),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2~23)라고 고백을 하였다.

특히 솔로몬은 성욕이라는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후비(後妃) 700명과 빈장(嬪嬙) 300명 등 1,000여 명의 후궁들을 두었으나, 도리어 그들로 인하여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왕상 11:3). 그런데도, 그 마음에는 항상 실존적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이방 여인들에 의하여 이방 신(神)을 들여와 영적인 음행까지 용납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나라가 둘로 쪼개지게 되었다. 가정으로 말하면 가정파탄이 일어나 풍비박산되었다는 뜻이다. 이조(李朝)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은 채청사(採靑使), 채홍사(採紅使)를 통하여 전국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불러들여서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며 흥청망청(興淸亡淸) 쾌락을 즐겼으나,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과, 수많은 여인으로도 허전함을 달랠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은 여인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변질 된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도 끝도 없이 다른 여인들에게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나, 이 육욕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 때, 실존적 욕망의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알베르트 카뮈(Albert Camus)의 작품인 “간부”(Adulterous Woman)라는 단편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필자는 영어로 된 이 작품을 감명 깊게 읽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본 남편에게서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실존적 남편을 찾아 외도의 길을 헤매는 내용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본질적인 성적 본능을 추구하나 여의치 않으므로, 육체적 남편 외에 실존적 다른 남편을 찾아 헤매는 내용으로, 육체적 남편에게서 자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이상적인 실존적 남편을 만나 황홀한 체험을 경험하고 다시 현실로 육체적 남편의 품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 본능에 따라 정상적인 욕망을 추구하지만 이루지 못하고, 잘못 실존적 남편을 찾아 헤맨다는 교훈이다.

“간부”(姦婦)는 돈 많은 부부(마르셀과 자닌)가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아랍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리가 날고 있는 차 속의 상황이 고루하고 무미건조한 세상의 삶(mundane life)의 여행에 대한 이미저리(imagery)를 보여준다. 그들은 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부부간의 황홀한 꿈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남편 품에 안겨 잠을 청하던 여인의 마음은 무엇인가 허전하고, 남편에게서도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실존적 욕망에 이끌려, 남편의 이불 속을 가만히 빠져나와 무엇인가에 이끌려 광활한 아랍의 광야에 우뚝 서 있는 테라스 정상으로 향하게 된다. 테라스 정상에 오른 이 여인의 시야에 저 멀리 아라비아 사막 끝에 아랍인들의 천막촌이 보이고, 그 끝은 하늘과 맞닿아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된 정경이 들어 온다.

하늘을 쳐다보니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 하늘은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과 맞닿아 하늘과 대지가 하나 되는 천지 일체(the unity between heaven and earth)의 정경이 벌어진다. 하늘을 쳐다보던 여인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 빙빙 도는 혼미한 감정을 느끼며 하늘과 하나 되는 순간, 그만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엎어진다. 그 순간 하늘과 하나가 된 자신이 대지와도 하나가 되는 경험으로 무아경(無我境)의 황홀한 감정을 맞보며 정신없이 엎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 일체(天地一體), 남녀 일체(男女一體)로 인한 실존적 오르가슴(orgasm)의 황홀한 경험이다. 한참 후에 대지의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정신이 들어 다시 일어나 테라스 정상에서 내려와서 호텔로 들어가 조용히 남편의 품으로 들어간다.

위의 이야기는 육체적인 남편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여인이 이상적인 실존적 남편을 찾아 외도함으로 얻으려고 하는 황홀한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간부(姦夫)의 행위를 그린 것이다. 아마, 이것이 플라톤의 이상적 사랑(Platonic love)에서 얻을 수 있는 실존적 경험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존적 감정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거룩하고 온전한 인간의 본질적 본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으로 인간은 허황한 꿈을 꾸며 이 세상 허구의 세계(fictional world)를 방황하게 된다. 이것이 허황한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무상하고 허무하다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허사가(虛事歌)의 일부이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홍안 소녀 미인들아 자랑치 말라,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인간의 본질적인 본능들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한탄하는 선조들의 허사가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라는 곳을 지나가시다가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서 잠시 쉬고 계셨다. 그때 사마리아의 한 여자가 물을 길러 이 우물가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즉시 대화가 시작된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시니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며 반문한다. 예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대답하신다. 이에 여자가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라고 하자, 예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여자는 선뜻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간청한다. 이에 예수께서 뜻밖에도 “네 남편을 불러오라”라고 뜬금없는 주문을 하시는 것이다. 이에 여자가 양심에 가책과 부끄러워 당황하면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예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이 대화의 주제는 타락한 인간은 육체적이며 실존적인 욕망으로도 본질적인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 여자가 세상에서 육체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섯 남편, 아니 여섯 남편을 섬겼지만, 여전히 본질적인 욕망을 채울 수 없어 텅 빈 듯한 허전한 가슴을 끌어안고 고루한 삶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다섯 남편 모두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남편은 영원한 남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고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정을 붙이고 살 수 있는 남편은 육체적인 남편과 실존적인 남편이 아니며, 진정으로 영원한 남편(eternal husband)은 바로 그 여자 앞에서 아가페의 대화를 이어가며 그녀에게 프러포즈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중심 메시지이다.

오직 참 남편이 되시는 예수께서 육체적인 욕망이나 실존적인 욕망이 아니라, 본질적인 본능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메시지의 중심이다. 이 말씀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육 간의 구원으로 본래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의 궁극적 목적인 본능적 욕망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 욕망은 “부활”이라는 영화로운 몸에서 영원한 남편이 되시는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관계 속에서 영육 간 온전한 행복(至福, bliss)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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