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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In His Steps: “What would Jesus Do?”)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1-07-06 (화)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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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요사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원로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과 원성으로 교계가 대단히 시끄럽다. 특히 WCC, KNCC와 북한에 다녀온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오염되었다는 의혹이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사실, 기독교의 원로 지도자들이 한국교회 부흥에 끼진 영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결과론적으로, 선교정책의 실패와 바른 정의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이에 더하여 사회주의 성 정치적 발언이나 글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교회의 물질(재정)적인 운영과 윤리적인 부덕의 문제도 한몫했겠지만, 작금에는 사상적(이념적)인 의혹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 같다. 과거에 선교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득(得)보다는 실(失)이 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기에 봉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교와 사회봉사가 순수한 기독교적인 것을 넘어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교회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도덕적 죄와 대사회적, 국가적 사역에 대한 실책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What would Jesus do?) 이 말은 1896년 미국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의 목사인 찰스 먼로 쉘던(Charles Monroe Sheldon)이 쓴 기독교 소설(novel/fiction)의 제목인데, 얼핏 보면, 영어 제목인 “In His Steps”(그의 발자취를 따라)의 뉘앙스로 인하여, 종교개혁 바로 전의 토머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의 작품인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와 똑같은 그리스도의 봉사 정신을 그린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우선 쉘던의 “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는 인간 예수의 사랑을 강조한 사회복음(Social gospel)을 배경으로 한 것인 반면에,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현대적 헌신의 영성(the spirituality of the Modern Devotion)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세기적으로 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best seller)가 되어 엄청난 판매 수를 기록한 것이기에 더욱 관심이 있는 것이다.
 
전자(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는 사회 선교적 차원에서 종교와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의 사랑(자비)을 실천하기 위한 사회봉사(social service)를 의미한다면, 후자(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자기성찰과 겸손, 자기부정과 자기 훈련을 통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을 위한 헌신(the devotion for man)을 강조하고 있다. 전자는 인간 예수의 자비,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께서 실천하신 자비 행위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의 사랑과는 별도로 인간의 자비를 강조하고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인간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인간 예수의 사랑을 강조하나, 후자는 하나님의 영적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전자는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과 예수의 인간적 사랑을 분리해서 이해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같이 이미 18세기 칸트(Immanuel Kant) 이후, 신학자 중에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의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면서 그의 경륜(the Economy of Triune God)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mission)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work)이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이 세상에서(on the earth) 하라고 주신 일, 곧 그 사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to glorify God)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말씀(the Word of God)을 전하여 그 말씀(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eternal life)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요 17:3~4).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이란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에 앞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최우선순위(top priority)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사명)이 세상을 섬기라는 주제는 동일하나, 그 내용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일(사명)에 있어서, 전자의 사회복음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상이든 이념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의미하나, 후자는 하나님의 영적인 사랑을 전제로 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리스어에 사랑은 육적인 에로스 사랑(ἔρος)과 친구 사이의 필리아(Φἴλια)) 사랑, 동족애의 스톨게 사랑(στοργή), 그리고 기독교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인 아가페 사랑(άγάπη) 등이 있는데, 예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애정과 우정과 동족애의 발로로 실천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발로로 실천하는 사랑으로 나누어지는데, 바로 전자의 사회복음주의 사랑은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며, 후자인 하나님의 아가페에 기초한 영적인 사랑은 신본주의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진보주의(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개혁주의)의 차이를 볼 수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러, 기독교 사회에서 인본주의 사랑의 실천 운동(물론 예수의 사랑으로 말하지만)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신학적, 사상적 배경이 사회복음 또는 사회복음주의라는 것이다. 사회복음주의(The Social Gospel Movement)는 성서적인 바탕 위에서 존재론적 접근(Ontological approach) 방식을 채용하는 성서복음주의(The Biblical Gospel Movement)와 달리, 사회적 상황(social situation/context)을 바탕으로 하는 구조적(Structural approach) 접근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사회복음주의는 신본주의적 성서복음주의와 달리 인본주의적 복음주의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적 상황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중심이 곧 인간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정의, 범죄, 노동, 전쟁, 평등 등의 사회적 주제에 대하여 기독교 사상으로 접근하지만 실제로 성경적인 기독교 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은 월터 라우센부시(Walter Rauschenbusch), 리처드 엘리(Richard T. Ely), 워싱턴 글래덴(Washington Gladden), 찰스 먼로 쉘던(Charles Monro Sheldon) 등과 같은 사람들이 주도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 구원보다 사회구원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인간 개인의 구원보다는 사회의 윤리적인 면에 집중하여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교회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좀 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영혼 구원보다는 인간의 사회적 윤리 관계에 관심이 있어서 은혜로운 구원의 메시지보다는 윤리적인 비판에 집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영적 구원과 개인의 권리존중에 앞서, 사회라는 집단적인 구원과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결국은 전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일각에서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사랑(자비)을 빙자하여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사회성인 이웃 사랑의 관계로 잘 포장해서 전파되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미혹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사도들의 지도하에 유무 상통했던 행위를 사회주의적 행위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사회주의의 유무 상통은 있는 자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서 나누어준다고 하지만, 초대교회의 유무 상통은 자발적인 행위에 따라서 기쁜 마음으로 도네이션(donation)을 하는 것이며,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주의의 유무 상통은 독재자의 강제적인 명령(coercive order)에 따라서 빼앗는 것이지만, 초대교회의 유무 상통은 하나님의 사랑(love)과 은혜(grace)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헌납하는 일종의 헌물(獻物)이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이러한 행위의 내면에는 자본(재산)의 사유화를 부정하는 데 있는데, 기독교의 소유 관은 하나님의 축복에 따라 각자의 자본(재산)을 맘대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성경의 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책들이 사회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일각에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체성의 위기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기에 과연 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사회주의 편을 들었을까?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 편을 들었을까?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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