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총 게시물 2,109건, 최근 0 건
 

 

장부영 박사 칼럼, 예수 그리스도는 데모대의 리더였다? (Jesus Christ was the Leader of Demonstrators?)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1-08-18 (수) 11:12
장부영.jpg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언젠가 필자가 속해있던 미국 교단의 교역자협의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초청된 강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관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 압제당하는 자, 가난한 자, 천민 등 민중들을 모아 데모를 주도했던 데모대의 리더(leader)였다”라고 말해서 세미나 현장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강사는 노골적으로 예수께서 그 당시 부패했던 정치사회에 개입해서 민중들을 이끌고 행동에 나섰다며, 공공연하게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의 입장을 역설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공학적인 차원에서 언급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군중들에 둘러싸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행진하여 입성했다는 것이다(눅 19:28~38). 결국, 데모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당시 혼란스러운 가운데, 시간이 부족해서 필자는 손을 들고도 질문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 아쉬워했고, 강의시간이 끝난 후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함께 둘러앉아 식사하던 목사님들에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중들의 데모 구호가 무엇이었으며, 예수께서 올라가신 목적지가 어디며 무엇 하려고 가셨습니까?”라며 반문한 적이 있었다. 

사실, 196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급진신학(Liberal theology)이 물밀 듯 몰려오던 시기였다. 기존의 정통신학(Orthodox theology)을 위협하는 인본주의적인 실존주의 신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학, 특히 정치신학 부류에 속하는 남미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일본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등 헤아릴 수 없는 토착화신학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들은 실천적인 세속화 신학의 일부이지만 그 외에도 서구에서 유입된 존재의 신학, 실존주의 신학, 소망의 신학, 심지어 사신신학 등등 이론 신학들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신학 중에서도 정치적인 격변의 시기였던 1960대 이후에 정치신학에 매력을 느껴 전술한 바와 같이 신학자들도 성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현실정치에 몰입하신 정치적 운동가인 것으로 신학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참여에 직접 개입하셔서 정치 활동하신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격(God˗man personality)과 사역(His works)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에 대하여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께서도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 호되게 질책하신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참여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알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거짓과 폭력이 아닌 진리의 봉화를 들고 옛날 선지자들과 같이 정의를 위해 성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인간과 우주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 이시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출세나 해보려고 군중들이나 몰고 다니는 데모대의 리더(앞잡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로, 설령 그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시가행진(?)을 하셨다는 것으로 백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진이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었고, 그를 따르는 군중들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정치구호나 누구를 성토하는 과격한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Messiah)를 환영하는 영적인 축제의 현장이었다는 것과 전혀 폭언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의 정치적 왕이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환영하며, 하나님께 찬송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잡으려 하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만일, 내가 저희와 싸운다면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라고 하시면서, 순순히 잡히신 것은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다(요 18:36).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가셨는가? 라는 문제이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사실이다(눅 19: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의 어디로 가셨는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시지 않았던가? 만일, 그의 시위(demonstration)가 정치적이었다면, 당연히 헤롯 왕이 거하는 “헤롯 궁”으로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과거 4.19혁명 시에 데모가 극에 달했을 때 필자는 수술받고 서울에 있었는데, 그때 데모대들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몰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왜인가? 그 당시 데모대가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속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외치며 경무대로 올라갔던 것이다. 물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사정을 몰랐다며, “국민이 원한다면”이라고 하면서 즉시 하야했던 역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말이다. 데모대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올라간 곳은, 바로 정치의 중심지인 경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의 중심이며 정점인 “헤롯 궁”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셨다. 이래도 예수께서 정치적인 데모의 리더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넷째로,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문제이다. 예수께서 데모대를 이끌고 이 세상 현실정치의 왕인 헤롯에게 간 것이 아니라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 청결 작업을 하셨다. 그 안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자, 비둘기를 파는 자 등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므로 세속화된 성전(종교)을 깨끗게 하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5~46)라고 분노하신 것을 보면, 그는 세상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도래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위하여 일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은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교개혁의 실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도 분명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눅 18:36)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크리스천들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그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그의 나라를 위하여 섬겨야 하며, 다른 한편 이 세상에서 발붙이고 살고 있으니 이 세상의 나라 즉 자기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한마음과 한 몸을 가지고서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나 성경적인 원리로 보면, 한 몸을 가지고 두 가지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의무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막 12:17)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지체의 법)을 섬긴다”(롬 7:24~25)라고 했다. 

그런데 이 두 법을 동시에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로다. 물론 인간으로서는 한 몸을 가지고 동시에 이 두 법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으로서는 영혼과 육신이 따로 놀기 때문에 항상 내적 갈등으로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인간이 범죄 함으로 받은 결정적인 이 문제는 인간으로서 완전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의 의무로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며, 어느 것을 먼저 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이다. 이 점에 있어서 크리스천들이 전대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인 최우선 순위(top priority)는 반드시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는 진리이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재물이란 일시적인 것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섬기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이 원리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저작권자 특수경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특수경찰신문 / 발행인/편집인 : 이주태 / 발행(등록)일자:2012년 2월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8번지 대일빌딩 4층
TEL:02-2213-4258 / FAX:02-2213-4259 / 등록번호 : 서울 아01956 / 청소년보호책임자:이하영
Copyright ⓒ 특수경찰신문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