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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영 박사 칼럼,"교수의 학문과 인격" (Learning & Personality of Professor)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2-04-15 (금)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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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어떤 분이 대학교에 다니면서 교수들에 대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력한 결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마음이 몹시 상했던 모양이다. 지도교수들에 대한 불만이 걸림돌이 되어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꼭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나?”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학문”보다도 “인격”에 회의를 느낀 것이다. 어떤 교수에게서는 학문 수준에 대한 모멸감, 어떤 교수에게서는 인격에 대한 모독감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님의 이 말씀 속에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참 진리의 인격체이신 예수를 가르치고 배우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여러 학교에 다니면서 교수들에 대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노력한 결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과정에서 마음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지도교수들에 대한 불만이 걸림돌이 되어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꼭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나?”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핵심은 교수들의 “학문”보다도 교수들의 “인격”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어떤 교수에게서는 학문에 대한 모멸감, 어떤 교수에게서는 인격에 대한 모독감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님의 이 말씀 속에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참 진리의 인격체이신 예수를 가르치는 산지식을 배우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식은 물론 인격까지 제자들에게 전수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지식은 물론, 제자들을 교육하시면서 자신의 신성(deity)과 인성(humanity)에 관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clear᭸cut) 가르치셨다. “지식”뿐만 아니라 “인격”에 관한 교육을 의미한다. 지식과 인격이 분리되어 겉돌게 되면, 부조리와 불신이라는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예수께서는 지식과 인격이 융합된 분이시다. 가르침에 있어서 지식의 내용과 자신의 인격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진리 가운데 핵심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는 말씀이다. 진리를 알면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다. 주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어보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주님께서는 진리와 생명의 실체가 되신다는 뜻이다.

신학교 학생 중에 남아공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지만, 다른 학위가 필요하므로, 한국 신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목사님이 계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졸지에 설암(舌癌)에 걸려 수술했기 때문에 결석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담당 교수가 과일을 사 들고 먼 곳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그 학생(목사님)과 사모님이 반색하며 맞이하면서 놀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니 교수님이 학생을 직접 심방을 하시는 것 처음 봅니다.” 이에 교수가 대답하기를, “교회에서는 교인이 양이라 목사가 심방을 하지만, 학교에서는 학생이 양이니 교수가 심방을 하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는 교수가 학생에게 교수의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수의 “인격”까지 전수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목사님(학생)이 설암이 재발하여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교수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 교수를 애타게 찾았다는 것이다. 오셔서 기도해주시라고. 필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가장 친한 친구 목사님이 위암 수술, 대장암 수술하고도 잘 버텼는데, 간암으로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해달라고 필자를 애타게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듯 하는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 한국에 있었다면 소천하기 전에 찾아가서 기도를 해드렸을 터인데 미국에 있었고, 연락도 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목사나 교수는 교인이나 학생에게 지식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적인 사랑을 주어야 한다. 필자가 신학교 다닐 때, 존경하는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이 바로 한국 최초로 신구약 주석을 집필하신 총신대학교 박윤선 박사님이다. 학생 시절에 박윤선 박사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필자가 지식에 갈급한 마음으로 교수님께 여쭈어보았다. “교수님 유학하고 싶은데 어찌해야 될까요?” 이 말에 교수님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뜻을 굽히지 않고 “그래도 목회를 잘하려면 좀 더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교수님이 픽 웃으시면서, 목회하는 데는 생각하는 것만큼의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박윤선 교수님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순수하고 순진하신 모습 때문이다.

한번은 제자들을 통하여 사방 수소문해서 필자의 교회를 찾아주시고 주일예배 설교를 해주셨다. 그래서 점심대접을 하고 사례비를 드렸다. 그런데 며칠 후에 소포가 하나 도착해서 열어보니 박윤선 교수님이 보내신 것이었다. 드린 사례비와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새 양복 한벌을 보내시면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다. 세상과 절연한 분 같았다. 그분은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시는 것 같이 보였다. 쌀값이 얼마인지, 심지어 본펜 하나 값이 얼마인지도 모르셨단다. 이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교수가 전수해주어야 할 것이 바로 지식은 물론, 사랑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교수의 지식보다는 교수의 인격적인 감화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필자가 신학교 학생 시절에, 설교연습 시간이 있었다. 한 사람씩 설교하고 설교학 교수님이 평가하게 되어 있었다. 앞서서 많은 학생이 설교했고, 교수님이 평가했다. 맨 마지막에 필자가 설교하고 교수님이 평가하는데, 필자의 설교 중에 첫 대지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다. 그 당시 필자의 설교 제목은 “아브라함의 신앙”(롬 4:16~25)이었는데, 첫 대지가 “아브라함의 신앙은 창조적 신앙”(롬 4:17, 19)이었고, 둘째 대지는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 신앙”(롬 4:17)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Creatio᭸xnihilo” 신앙이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Resurrection” 신앙이라는 뜻이었다.

이 중에서 교수님의 말씀은 첫 대지인 아브라함의 신앙은 창조적 신앙이라는 내용 가운데, “창조적이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인간의 신앙에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창조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성경 본문에 아브라함의 신앙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를 믿는 신앙”(4:17: 한글 개역, KJV, NIV, ASV, RSV)이라는 뜻이라고 반론하자, 그 교수님이 대답을 하지 못하시고,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을 내면서 나가버리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과목에 B 학점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성적은 차치하고라도 교수의 인격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역시 신학교 3학년의 칼빈주의 과목을 담당하신 교수님에게서 놀라운 인격을 발견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총신대학교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으로 서울의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분이었다. 필자가 그 과목 시험을 치게 되었다. 주관식 시험문제로 네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한 문제당 25점씩 100점이 만점이다. 필자가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고 의기양양하게 나와서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보니 뒷면에 있는 넷째 문제를 보지 못해서 답안을 쓰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답안을 아무리 잘 작성했어도 75점밖에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다 못해 공중전화 부스에서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제가 시험지 뒷면에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해서 답안작성을 못 하고 나왔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교수님께서 차분한 말씀으로 걱정하지 말란다. 앞 문제의 답안 작성한 것을 보면, 뒤에 있는 문제의 답안을 쓸 수 있는 실력이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상대로 성적표를 받아 보는 순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A 학점)을 받은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그 교수님의 멋진 해법에 감탄하며 감사하고 있다. A 학점을 주셨다고? 아니다, 교수님이 명쾌하고 멋진 액션 모습에 감동한 것이다.

교수라면 적어도 지식에는 물론 인격에 있어서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아닌가? 사도 바울도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 하느냐”(2:21)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5:20)라고 하셨고,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도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3:1)라고 했다. 그만큼 선생 된 교수의 직분도 하나님의 양을 맡은 목사들 못지않게 소중한 직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수는 해박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훌륭한 인격을 겸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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