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총 게시물 2,515건, 최근 0 건
 

 

장부영 박사 칼럼, "나의 고난과 욥의 고난" (My Sufferings and Job’s Sufferings) (1)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교수*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0-07-19 (일) 22:34
장부영.jpg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박사 *

[나의 고난 욥의 고난] (My Sufferings and Job’s Sufferings) (1)    

이 세상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당할 때에는 누구나 스스로의 신앙심(?)에서 욥의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을 때에, 이 고난의 문제를 붙들고 몸부림친다. 필자도 경험한 이러한 고난들을 주위에서 심심찮게 보게 되어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게 된다. 요사이 페북(Face Book)에서 필자의 글에 댓글로 자신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려주신 목사님이 계신다. 그 분은 목회신학 박사이신 황의찬 목사님으로 목회를 하면서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할 정도로 글을 잘 쓰시는 엘리트 목사님이시다. 그에게는 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두 자녀가 모두 청각장애자로 농아(聾啞)라고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중에서 아들은 수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고, 삼십 대 후반인 딸에게는 두 자녀가 있는데 그의 딸 자신이 청각장애라 자기 자녀들과의 소통이 어려워서 할아버지인 목사님이 통역을 해주다시피 하신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가정사정이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황의찬 목사님은 스스로 신학적인 질문을 하시곤 하는데, 이러한 고난을 짊어진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신학적인 주제로 논란을 벌리는 모습을 보면 몹시 화가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고난을 주셨습니까?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Why should God allow me of all people such a sufferings? Why me?)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시겠지요? 억지로 성경말씀에 합리화시키면서도 답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 그 질문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신학의 주제들은 그에게는 절박한 현실로 다가와 학문속의 신학은 그에게 낱낱이 실존으로 육박해오지 않는 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신학은 물론 성경말씀까지도 자신의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실존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매우 유사한 고난의 짐을 지고 계신 필자의 절친 목사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분은 중풍으로 교회에서 일찍 은퇴하시고, 지병과 사투하고 계시는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이시다. 심지어 대기권에 들어올 때에의 고열에 견딜 수 있는 왕복우주선의 타일(tile)을 발명하여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본교회의 장로님께서 세상에서 우리 목사님이 가장 훌륭하시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목사님이시다. 필자와 미국의 리폼드신학대학원(RTS) 박사과정에서 같이 공부하신 목사님이시다.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자기 교회를 천여 명에 가까운, 미국에서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존경받는 목사님이시다. 그 목사님과 미국교단(CRC)에 몸담고, 같은 학교에 다니던 지난날들이 필자의 기억에서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그 목사님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두 딸 모두가 정신장애자로 목사님에게는 큰 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목사님 자신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중풍으로 쓰러져서 팔 다리가 불편하고 거동이 힘들어 항상 곁에서 사모님이 그의 손발이 되어주신다. 사모님이 그 목사님을 위해 운전과 식사를 비롯하여 모든 일에 도우미가 되신다.

 

우리 주위의 친구 목사님들 사이에서 그 목사님을 생각할 때면, 아니 인품도 훌륭하시고 목회도 성공하시며, 나무랄 때가 없이 훌륭하신 목사님에게 왜 저런 고난이 연속되는가?”라고 하며 모두들 이해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럴 때마다 욥의 고난을 떠올리며, “까닭 없는 고난에 대하여 회의하곤 한다. 과연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 연속되는 숱한 질문이 이어지지만, 신학적으로 심지어 성경적으로도 딱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당사자들은 물론 곁에서 고난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친구들까지 속수무책이 아닌가?

 

불교의 법화경에 보면, 사체의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것이 있는데, 첫째, 인간은 본래부터 고난을 안고 나온 존재라고 해서 고체(苦諦)라고 하며, 둘째, 이 고난의 원인이 욕심에 있다고 해서 집체(集諦)라고 하고, 셋째, 그런고로 이 욕심을 없애야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해서 멸체(滅諦)라고 하며, 마지막 넷째로, 이 모든 고난은 팔정도(八正道)의 수련으로 해탈하여 도체(道諦)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열반숙정(nirvana)에 다다른다고 한다. 물론 이 불교사상의 저변에는 허무주의(nihilism)와 범신론(pantheism)이 깔려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더구나 정직하게 살고 있는 훌륭한 분들의 고난도 그 분들의 죄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고난의 원인이 죄라고 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원죄(peccatum originale)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자범죄(peccatum actuale)에 의한 고난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러한 고난의 원인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성경은 고난의 원인에 대하여 직답을 피하고 우회적으로 답한다. “이 고난의 원인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이 이 사람의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는 뜻이라고 하셨다(9:2-3).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사건으로 죽은 열여덟 명도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우회로 말씀하신다(13:4-5). 회개를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오래전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수년전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실까?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로 인하여 죽은 자가 수십만 명이 넘는데 수없는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핸들하실까? 수없는 개인의 관계, 가정, 사회, 국가관계 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간의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루실까? 물론, 머리칼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도 정확하게 핸들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는 할 말을 잊게 된다.

 

물론, 고난의 원인이 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은밀 의지(secret will)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칼빈(Calvin)과 알미니우스(Arminius)가 극심한 논쟁을 벌였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issue)로 양편의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소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sovereign of God and free will of man) 사의의 충돌이 생기게 된다. 이 주제는 또한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과 같은 대선지자들도 문제로 제기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백성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 않았는가?(5:1; 10:15; 29:16; 18:25) 물론, 이 주제는 비유 중에 포도원의 주인과 일군들과의 노사문제로 제기되어 주님께서 명쾌하게 해결해주신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도 이 주님의 해답을 통하여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주제로 이해하면 되리라고 믿는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20:15) 이것은 조직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에 대한 언급이고,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아니하였느냐?”(20:13) 이것은 성서신학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약속”(the covenant between God and man according to man’s free will)에 대한 언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특별히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불공평에 대하여 끈질기게 질문한다(73:3-16). 하나님이 불공평하지 않으시냐고?(18“25)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불공평한 것이다”(18:25) 라고 응수하시며 토기장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절대주권(absolute sovereignty)에 대하여 교육하신다.

 

시편 73편에 보면, 아삽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실족하고 미끄러질 번했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을 토로한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도리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실족할 번했다면서, 악인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건강하며 고난과 재앙도 없이 재물을 모으며 항상 평안한 것을 보면서, 자신이 마음을 정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로 헛되다고 한탄한다(73:2-13). 그리고 자신은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고 매일 징벌을 받는다고 불평을 토로한다. 아마 욥의 심정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그 원인에 대하여 어찌하면 알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며 심히 곤란할 때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악인이 잘 됨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고난도 잠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붙드심과 그 후에는 영광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알게 되었다는 말씀에는 신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을 좀 더 상세하게 주석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자신의 불평은 성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에 말끔하게 사라진다는 뜻이다. 성소 밖에서 즉 하나님을 떠나서 볼 때에 세상만사가 우리의 불평의 요인이 된다. 성소 안에서 즉 주님 안에서, 신령한 의미로 자신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불만불평은 안개와 같이 사라진다. 둘째로, 성소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불평이 감사로 변한다는 뜻이다. 성소 안에서 특히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속죄소(mercy seat)에서 만나주시고, 그 속죄소 즉 시은좌(mercy seat)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은혜를 받는 순간 인간 세상만사에 대한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와 찬송으로 변한다. 주안에서의 고난은 꿈을 꾸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73:20).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한 것이 자기에게 복이라며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라고 선언하게 된다(73:23-28).  

계속 -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저작권자 ⓒ 특수경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특수경찰신문 / 발행인/편집인 : 이주태 / 발행(등록)일자:2012년 2월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8번지 대일빌딩 4층
TEL:02-2213-4258 / FAX:02-2213-4259 / 등록번호 : 서울 아01956 / 청소년보호책임자:이하영
Copyright ⓒ 특수경찰신문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