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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영 박사 칼럼, 생각으로 말하는(Brain to Brain) 사이보그(cyborg) 시대가 열린다!

미국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교수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0-08-31 (월)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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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교수*

생각으로 말하는(Brain to Brain) 사이보그(cyborg) 시대가 열린다!    

근래에 들어 RC-12X 가드레일, 리베트 조인트, E-8C 조인트 스타트 등과 같은 미국의 감청정찰기들과 빅토리어스, 에이블, 하워드 로열, 이펙티브 등과 같은 음향측정함정들이 한국 상공과 영해를 번질나게 드나들고 있다. 왜일까? 북한의 핵미사일의 징후를 추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전략자산들은 음향, 즉 소리를 수집하여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를 탐지하여 정보를 얻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분석하여 그 말들의 뜻을 알아내려고 하는 정보수집 방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음향의 사이클들(cycles)을 분석하여 정보를 파악하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사이 사이보그(cyborg)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말하자면, “생각(두뇌)으로 말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상대방과 마주할 때에 말을 하지 않아도 생대방의 생각을 통하여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영적인 세계에서 뜻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으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 세계의 육체인간들 사이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현대과학의 힘을 빌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말을 하지 않고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생각으로 말하는 사이보그라고 한다. 사이보그(cyborg)라는 말은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사용된 것으로 이미 1960년대에 사용되었던 용어로서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 “스타트랙의 보그”(Star Trek’s the Borg), 그리고 사이보그와 우주”(Cyborg and Space)등에 연관되어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어들이 아니고, 전자석 신호임을 이해하는 한, 두뇌들(brains) 사이에 텔레파시 커뮤니케이션(teleplays communication)이 가능하다고 한다. 뇌가 보내는 여러 가지 신호들(signals)을 포착하는 자기뇌파검사와 같은 기술들이 특수한 신호들을 포착하여 전달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모스(morse) 코드(code)로 신호를 바꿀 수 있도록 뇌를 훈련할 수 있다면, 헬멧(helmet) 안에 있는 센서들(sensors)이 그 메시지를 받아서 다른 헬멧으로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생각의 뇌파를 헬멧 안에 있는 센서를 통하여 상대방의 헬멧으로 보내면 그 헬멧 안에 있는 센서가 받아 모스 부호로 바꾸어서 판독하여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생각으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말을 주고받는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나의 와이프(wife)가 하는 말을 들으며 안타까워할 때가 있다. “왜 하나님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대답이 없으시냐?”고 묻는다. 할 수 없이 나는 믿는 대로 되리라 했으니 믿어.”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물론 신학자인 내가 할 대답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로서도 딱히 어떻게 대답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sola fide)뿐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이성(reason)이나 오성(understanding)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1:1-40).  

지난밤 꿈에서 예수님과 성경공부를 했다. 예수님께서 일문일답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해주시는데 희한하게도 이해가 잘 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잠을 깨자마자 기록해두려고 했지만 금방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쉽지만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성령께서 임하시면 생각나게 하시겠지(16:4)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만 따라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이러한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 말함으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교회의 어느 권찰님이 네 댓살 먹은 딸을 안고 교회로 들어와서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소아마비란다. 아이쿠, 이 병은 불치병인데 라는 생각에 그만 앞이 캄캄해진다. 그래서 왜 병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이리로 왔느냐고 도리어 책망 조(?)로 물었다. 그러니까 권찰님의 말씀이,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하니까 딸이 교회로 가, 교회로 가라고 울부짖어서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믿음이 없을 때에 교인들이 찾아와서 병 낫기를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할 때와 같이 당혹스럽고 엄청나게 부담스러울 때가 더 있겠는가? 할 수 없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자 하고 데리고 들어가서 다리가 흐늘흐늘 하는 그 아이를 교회당 안에 눕혀놓고 쳐다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하기 짝이 없고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믿습니다. 아멘!” 하고 돌려보내기엔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고, 고칠만한 믿음은 조금도 없으니 그야말로 답답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기도해서 그 아이의 병을 고치라고 하시지 않는가? 이 때부터 예수님과의 순간적인 카이로(Kairos)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 아이를 고칠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나도 안다. 네가 그 아이를 고칠만한 믿음이 눈곱만치도 없다는 것을 안다.” “네게는 그 아이를 고칠만한 작은 믿음도 없지만, 그 아이 속에는 믿음이 있느니라.” 그 순간 그 아이 속에 있는 믿음을 알게 되었다(14:9; 5:34; 10:52; 7:50; 8:48; 17:19; 18:42). 무엇으로? 방금 그 아이가 교회로 가, 교회로 가라고 울부짖어서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께 그 아이 속에 있는 믿음을 어떻게 붙잡고 기도를 합니까?”라고 여쭈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 아이 속에 있는 믿음을 끄집어내서 붙잡고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대답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아이 속에 있는 믿음을 어떻게 끄집어내란 말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입으로 신앙고백을 시켜서 토해내도록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붙들고, “지금 전도사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를 위해 기도해주면 즉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묻자 그 아이가 서슴없이, 즉시 , 믿어요.”라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가? 할렐루야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지만, 다음은 어떻게 한담? 다시 예수님께 여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제 그 믿음을 붙잡고 기도하고 그 병마가 쫓겨나가도록 명령하라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명령합니까?” “내 종들인 사도들이 한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 때에 번뜩 머리에 지혜가 떠올랐다. 옳다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예수님과의 대화는 카이로스로 한순간에 끝났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의 두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고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라고 큰 소리로 명하며 두 손을 잡아 일으키니 즉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교회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3:8) 할렐루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명해서 일어나는 기적이 아닌가? 꿈만 같았다.  

오늘날 극단적인 정통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기적들(은사들을 포함하여)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의 2,000여 년 동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러한 기적들이 숱하게 일어났다. 물론, 애써 부인하려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본래 은사들(charismata)나 기적들(miracles)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하나님의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섭리(special providence)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이해가 되고 믿어진다는 신학적인 진리를 알아야 한다.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저작권자 ⓒ 특수경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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