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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영 박사 칼럼, “예스”(그렇다)와 “노”(아니다)가 불 분명한 사람들 (1)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0-09-16 (수)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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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교수*


예스”(그렇다)”(아니다)가 불 분명한 사람들 (1)


언젠가 아주 친한 친구로부터 중요한 부탁을 하는 전화를 받고 그 즉시 ”(No)라고 대답을 했더니 무척이나 서운하고 심지어 화가 났던 모양이다. 지나고 보니 내가 너무했나? 대답을 잘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한국 사람들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수십 년 살면서 미국사람들과 어울리고 미국문화에 젖어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산 것이 아닌가? 의심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새도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묻는 즉시 예스가 입에서 그냥 튀어나온다. 대답을 하고 나면 후회(?)가 되는데...내가 잘 못해서인가? 그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언짢게 하고 오해케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한국의 체면문화가 좋은 것 같기도 헌데...본질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상황적으로는 부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처세하기에 무척이나 어려워서 망설이게 된다. 본질적으로는 옳으냐”(right) “그르냐”(wrong)의 문제인데, 상황적으로 보면 미덕이냐”(virtue) “부덕이냐”(lack of virtue)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Christianity)를 먼저 접하고 받아들여 생활철학으로 삼았던 서구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 “Yes”“No”가 분명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아도 아닌 것은 그냥 “No”라고 말한다. 거기에 잡다하게 설명을 붙이지 않고 한 마디로 그냥 “Yes,” 아니면 “No”라고 대답한다.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야만 그제서야 왜 Yes인지 왜 No인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유교(Confucianism)를 먼저 접하고 받아들여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동양(한국) 사람들은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에 대해서는 즉시 예스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해서 빙빙 돌려가며 구구하게 설명을 하게 되는데, 한 참 설명을 들은 후에 그제서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열심히 성의껏 설명을 했으니 당신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서운함이나 오해를 피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우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될지 몰라도, 서구 사람들은 어리중절하게 된다. “예스”(Yes)인 것도 같고 ”(No)인 것도 같기 때문이다.

 

요사이 정치권에서나 교계에서 정체성(identity) 문제로 혼란스러운 것 같다. 여당인지 야당인지 아니면 중도인지에 대한 신분을 분명히 밝히라는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중도(中道)라는 말은 어느 쪽으로나 치우치지 않는 길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의미한다. 종교적 의미로는 치우치지 않는 도리(道理)로 불교의 법화경에서는 사체(四諦)의 마지막 단계인 도체(道諦)의 경지에 이르는 팔정도(八正道), 중관론(中觀論)에서는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를 의미하며, 그리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중체(中諦)의 도리를 뜻하는 것으로 유교의 중용(中庸)과 유사한 것으로 서양의 플라톤(Plato)의 가치의 질적 판단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덕과 악덕의 판단기준을 의미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도”(中道)의 철학은 정체에 대한 본질적인 판단이 아니라 상황적인 가치판단으로 이것은 생활의 처세(the conduct of life)를 의미하며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의 생활의 전략(the strategy of life)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싶다.

사실, 정치권에서 중도라는 사람들은 좌나 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인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상황에 따라 좌나 우로 가야하는 중간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에서는 본질(essence/identity)에 있어서 중도란 있을 수 없고, 처세에 있어서의 중도의 지혜(the wisdom of the golden mean)를 말하고 있으나, 이것도 본질의 전제(the presupposition of the essence)에서 출발한다. 즉 최선(sumum bonum)은 아니나 죄(sin)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덕(virtue)을 세우는 처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 예를 들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God says)과 같은 직접화법의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가 하면(the canonical story in narrative theology), 바울의 말과 같이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고, “나의 말이라고 하여 성경에는 인간의 신앙 양심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7:12). 이것을 가리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하여 신학적으로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양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저작권자 특수경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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