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총 게시물 2,512건, 최근 0 건
 

 

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 (The Immediacy and Progressiveness of Salvation)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기자명 : 이창희 입력시간 : 2023-01-04 (수) 10:55
장부영.jpg
*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교수 *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주로 영적인 구원(성화를 포함)을 비롯하여 육적인 차원(physical dimension)에서는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 다양한 위기에서 구출 받는 것,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는 것 등등‧‧‧. 그러나 본 글에서는 영육 간의 구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하나는 구원의 '즉각성'(immediacy/once)과 또 하나는 구원의 '점진성'(progressiveness/process)이다. 

구원의 즉각성은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으로(유 1:3; 히 9:25~26) 얻는 중생(regeneration/born again, 요 3:5)을 통한 영적 구원(벧전 1:9, 23)으로 궁극적 구원(ultimate salvation) 즉 완전한 구원(completed salvation)을 말하며, 구원의 점진성은 몸의 구속(부활)을 기다리며 성화의 과정(process of sanctification)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평생 이루어나가는 신앙 생활의 구원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업의 구원’과 ‘성화의 구원’이다. 여기서 성화의 구원을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성화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미완성(not yet)의 생활의 구원으로 죽은 후에 부활에서 완성된다. 즉 칭의(중생) 구원은 단번에 즉각적으로 완성되며, 성화(성숙)은 이 세상에서 계속되며 죽은 후에 완성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미(already) 원형(archetype)적으로 칭의(justification) 즉 중생(regeneration)에서 단번에 이루워졌고 현상(ectype)에서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상태(not yet)로 진행(process) 중에 있다는 종말론적인 구조(Eschatological frame)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화의 구원 즉 행위의 생활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의 양면성은 구약성경 모형(typology)의 원리를 빌리자면, 이스라엘의 구원 중, 영에 속한 사람(제2세대)에게 주어지는 가나안(천국)의 소유는 궁극적 구원으로 한 번에 이루는 칭의(중생)를 의미하며, 육에 속한 사람(제1세대)의 광야(실제 생활)의 과정은 임시적 구원으로 계속적(다회적)이며 점진적인 구원으로 신앙생활의 성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justification)는 단번에 주신 믿음에 의해 한 번으로 끝나지만, 성화(sanctification)는 평생을 지내면서 계속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은 완성되지 않으며, 영육이 분리되는 죽음 이후에나 완성되며, 영육의 부활과 함께 영화로운 몸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방불한 것이다.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인간이라는 본질에서는 같지만, 외모나 인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cf. 눅 1:80; 2:51-52). 그러므로 하늘의 상을 위해 거룩하며 의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엡 3:12-16). 

중생한 후에 자라는 과정에서 보이는 차이가 부활의 몸에서도 행함에 따라 그 영광 즉 영화로움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라고 했고, 부활의 영광(the glory of resurrection)도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름같이 다르다는 것이다(고전 15:41).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by God’s grace through his faith, 엡 2:8) 얻는 “유업의 상”에는 차이는 없으나, 행함에 따라(according to his works, 계 22:12) 받는 “보상의 상”에는 차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리에서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들도 ‘유업의 상’(골 3:24)과 ‘보상의 상’(고전 3:8; 3:14~15)에 관하여 수없이 언급하고 있다. 전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얻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이것을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중생, regeneration)이라고 했다. 예수의 피(blood)와 물(water)과 성령(the Holy Spirit)으로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 즉 상속받을 후사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단번에 이루는 완전한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아무리 잘못(범죄)을 해도 혈통(핏줄)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신생(new life)의 원리를 뜻하는 것으로, 거듭난 자 외에는 율법 학자인 니고데모까지도 깨달을 수 없었던 영적인 진리다(요 3:3~12). 

중생이란 임시적인 마음의 변화나 니고데모의 생각과 같이 육으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the Holy Spirit)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이는 영적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기능적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한다. 유업을 이을 자가 주인이지만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어서 세상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 하다가(갈 4:2), 장성해서 성인이 되면 상속하게 된다. 종노릇한다고 해서 유업을 얻을 상속자의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는 성화의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육체(σάρξ)의 유혹을 받아 세상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 하며, 범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기도 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유업’을 얻게 된다(갈 4:1~7).

생활(성화)의 구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이 성장하므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구원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salutis ordo)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바울은 이 경우를 염두에 두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했다. 이것을 중생으로 인한 궁극적 구원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생활에서 이루어 나가는 성화의 구원을 의미한다. 중생함으로 이미 유업의 구원을 이룬 사람들은 범죄할까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과정을 밟아 나가라는 뜻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범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생 후에 범하는 죄는 원죄(아담의 죄, peccatum originale) 혹은 원죄와 같은 죄(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죄, 성령 거역 죄, 히 6:4~6; 히 10:26)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범하는 자범죄(peccatum actuale)로 누구나 육신이 약해서 범할 수 있는 죄를 말한다. 전자를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했고, 후자를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로 회개의 과정을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고 했다(요일 5:16~17). 만일에 고의로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중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다른 말로 원죄를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중생한 사람은 십자가의 공로로 과거의 죄는 물론, 현재와 미래의 죄 사함도 원형적으로는(archetypically) 사해졌고, 표상적으로는(typically) 약속되어 성령으로 보증하셨기 때문에, 성화의 과정에서 회개와 보응(징계)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사함을 받게 되어 있다(히 12:4-13).

바울은 구원의 즉각성(롬 8:29~39)과 구원의 점진성(빌 2:12)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점진성의 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들이 구원 얻은 것 같다가 구원을 얻지 못한 것 같다를 반복하는 것 같이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믿음을 달라고, 믿음을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중생의 믿음이 아니라 성화를 이루어가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부단히 힘써야 할 것이다. 이 믿음이 떨어질 시에 중생한 사람도 자범죄(peccatum actuale)를 짓게 되고, 자범죄를 짓게 되면, 이에 대한 징계의 채찍으로 '보응'이 따르게 된다(히 12:5~13). 

칭의(중생)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단번에 얻은 구원을 다른 말로 영생인 “유업의 상”(골 3:24)이라고 하며, 평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구원을 다른 말로 성화 즉 행함에 따른 “보상의 상”(고전 3:8)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믿음으로 단번에 얻은 “유업의 상”(영생)은 영원한 것이며, 점진적으로 얻는 “보상의 상”(성화)은 행함에 비례하여 가중되는 것이다. 행한 대로 갚으시고(마 16:27)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는 뜻이다.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보면 이 두 가지 구원이 분리된 것으로 보이지만 디지털 방식으로 보면 하나로 보인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약 2:20-26). 이 부분에서 “유업”은 칭의(중생)로 이미(already) 단번(즉각성)에 얻은 완성된 구원으로 불변적인(unchangeable) 반면에, “보상”은 성숙(성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아직(not yet) 미완성(점진성)된 구원으로 가변적(changeable)이다.

중생으로 얻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났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다(요일 5:18; 벧전 1:23).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첫 아담과 같이 영생에서 탈락할 수 있는 원죄와 같은 죄를 범할 자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중생한 사람도 자범죄를 범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까지도 사해주셨다는 보증으로 성령의 인을 치셨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탈락하지 않는다. 다만 중생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자범죄는 회개와 징계라는 방식으로 보응을 받게 된다(히 12:4-13). 

만일, 유업의 상인 영생이라는 이미(already) 얻은 구원(요 5:24)을 잃을 수 있다면(Arminianism), 구원을 다시 얻기 위하여 다시 거듭나야 되는데(요 3:5), 그렇다면, 계속해서 영생(구원)을 얻었다 잃었다를 반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의문대로 육신이 모태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in the Spirit) 나는 것도 다시 두 번 세 번 나는 것이 아니다. 출생이란 육으로든 영으로든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지 반복해서 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증거한 대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사람을 기록한 "생명책"(The Book of Life)과 행위들을 기록한 "책들"(the books)에 의하여 "영생"과 "상벌"에 관한 심판을 하신다고 했다(계 21:11~15). 


중앙취재본부 이창희 기자 jesus9@daum.net

<저작권자 특수경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특수경찰신문 / 발행인/편집인 : 이주태 / 발행(등록)일자:2012년 2월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8번지 대일빌딩 4층
TEL:02-2213-4258 / FAX:02-2213-4259 / 등록번호 : 서울 아01956 / 청소년보호책임자:이하영
Copyright ⓒ 특수경찰신문 . All rights reserved.